조선 제1차 왕자의 난

2015. 5. 31. 23:30

조선 제1차 왕자의 난



태조의 왕자들




태조는 신의왕후 한씨와의 사이에 방우,방과,방원 등 여섯 아들을 두었고,계비 신덕왕후 강씨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두었다.


태조가 왕이 되자 누구를 세자로 삼을 것인지를 놓고 갈등이 일어났다.맏아들인 방우가 고려의 반역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행방을 감추어 버렸기 때문이다.


태조는 방과와 방원,방석둘 중에 한 명을 세자로 삼으려  했지만 왕비 강씨와 가장 믿는 신하인 정도전의 건의로 막내아들 방석을 세자의 자리에 앉혔다.


방원은 자신이 아니면 형이 될 줄 알았던 세자의 자리가 동생에게 넘어가자 큰 불만을 품게되었다.그러나 방석의 뒤에는 태조가 있었고 태조의 총애를 받는 왕비와 정도전도 있었다.특히 정도전은 최고의 군 통솔기관인 의흥삼군부의 판사직을 맡고 있는 인물이었다.섣불리 나섰다간 오히려 위험한 상황에 처할 수 있었다.


한편 방석을 세자로 내세운 정도전은 남은,심효생 등과 함께 비밀리에 모의한 끝에 태조의 병이 위중하다고 알려 여러 왕자들을 대궐로 불러들인 후 신의왕후 소생의 왕자들을 모두 죽여 없애기로 결정했다.그러나 정도전 일파의 계략을 눈치챈 방원과 방원의 부인 민씨의 기지로 대궐에 들어갔던 왕자들 모두 죽음을 피하라 수 있었다.






제1차 왕자의난 




이를 계기로 방원은 이숙번 등과 함께 정도전 일파가있는 남은의 소실 집을 포위하고 이웃집 세 곳에 불을 지르게 했다.깜짝 놀란 남은과 정도전은 황급히 달아났다.방원은 먼저 세자의 장인인 심효생 등을 죽인 후 정도전과 남은도 붙잡아 목을 벳다.




세자 방석은 믿었던 정도전과 심효생 등이 모두 죽었다는 소식이 듣고는 태조에게 달려가 목숨만 살려 달라며 매달렸다.이에 태조는 조정 중신들과 의논하여 끝까지 세자를 지키려고 했지만.세자를 경질하라는 여론이 크게 일어나자 어쩔 수 없이 폐위시키고 방번과 함께 귀양을 보냈는데 방석과 방번 또한 귀향 가는 도중에 살해당하고 말았다.


태조 7년 8월에 일어난 이 사건을 '제1차 왕자의난' '방원의난' '정도전의난'이라고 한다.






조선 제2대 임금 정종 탄생




태조는 방원을 세자로 책봉해야 한다는 대신들의 뜻을 물리치고 서열에 따라 둘째 아들인 영안군 방과를 세자로 삼으려 했다.이에 방과는 "조선의 건국에 가장 많은 공을 세운 사람은 방원입니다.저는 세자가 될 자격이 없습니다." 며 오나강하게 거절했지만 방원의 양보로 결국 세자가 되었다.


자식들이 서로 죽이고 죽는 꼴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일까.태조는 한 달 후에 왕위마저 방과에게 물려주었다.이로써 태조는 상왕이 되었고.방과는 조선 제2대 임금인 정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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