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과 집현전학자들

2015. 6. 3. 23:30

세종대왕과 집현전학자들

 

 


태종의 셋재 아들 세종대왕


 


태종의 셋째 아들인 세종대왕의 이름의 도,자는 원정이다.


태종8년(1408년)에 충녕군에 봉해졌다가 태종 13년에 대군이 되었다.태종 18년에 양녕대군이 폐위되자 세자로 책봉되어 그해 8월에 태종의 양위를 이어받았다.

 

일설에 의하면 양년대군은 태종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일부러 미친 척 행동해서 폐위를 당했다고 한다.

 


양녕대군은 그 후 줄째인 효령대군이 더욱 열심히 글공부를 하자 아버지 태종의 마음과 충녕대군의 뛰어남을 이야기하여 뜻을 접게했다고 한다.


이들 삼형제의 우애는 매우 돈독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양녕대군은 전국을 유람하면서 풍류를 즐겼는데 여러 차례 탄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세종의 배려로 무사할수 있었다.

 

한편 양녕대군의 충고를 듣고 순순히 세자 자리를 포기한 효령대군도 동생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불교에 귀의하였다.

 

효령대군은 회암사를 중수하고 원각법회를 여는 등 많은 불사를 주관했으며 반야바라밀다심경과 원각경 등을 한글로 해석하여 펴내기도 했다.두 형의 양보로 임금이 된 세종대왕은 재위 32년 동안 수많은 업적을 이룩하여 나라 안의 모든 백성들에게 성군으로 떠받들여졌다.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

 



세종은 학문을 좋아하여 새벽에 일어나 나랏일을 보기 위해 나가기 전까지 글을 읽었다.


세종이 늘 강조한 것은 "아무리 어려운 책이라도 여러 번 되풀이하여 읽게 되면 그 뜻을 저절로 알게 된다"는 것이었다.


세종은 정종 때 설치되었지만 유명무실해진 집현전을 대궐 안에 설치하여 뛰어난 학자들을 양성하였다.


집현전은 학문을 연구하는 기관으로 제도적으로는 도서 수집과 보관 및 이용,학문 활동,국왕의 자문에 대비하는 기능 등을 가지고 있었다.


세종은 도서 편찬에도 힘쓰게 하여 10명으로 구성된 학자의 수를 20명으로 늘려는데,10명의 학자에게는 학문을 연구하게 하여 매일 20명이 번갈아 글을 읽게 하였다.



 

세종은 집현전 학자들을 매우 아꼈고 학문에만 온 힘을 쏟을 수 있도록 도왔다.

 

젊은 학자들이 아침 일찍 들어와 학문을 연구하고 밤늦게 돌아가는 일이 많아 때로는 음식을 보내 대접하는 일도 있었다.







집현전 신숙주와 세종대왕 일화




어느 추운 겨울밤,세종대왕은 평소처럼 집현전에 들렀다.


자정이 훨씬 지난 시간이었지만 집현전에는 여전히 불이 켜져 있었다.안에 누가 있는지 궁금해진 세종은 옆에 있던 내시에게 일렀다.



"이 늦은 시간까지 누가 무엇을 하고있는지 알아보도록 하여라"

 

"네,마마.분부대로 겅행하겠나이다."



내시는 즉시 집현전으로 들어가 살펴보고 나온 후에 세종에게 아뢰었다.



"지금 신숙주과 책을 읽고 있사옵니다"

 

"그래?그럼 언제까지 책을 읽는지 보고 있다가 집에게 알리도록 하라."



세종은 집현전 학자들이 얼마나 열심히 공부하는지 알고 싶었던 것이다.세종대왕의 기대를 아는 듯 집현전의 불은 좀처럼 꺼지지않았다.


어느덧 긴긴 겨울밤이 지나고 새벽을 알리는 닭의 울음소리가 멀리서 들렸다.내시가 오기를 기다리던 세종은 직접 집현전으로 나아갔다.시기숙주는 고단해서인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왕은 계속 그를 지켜보았다.


신숙주는 마침내 책상 위에 엎드려 잠이 들었다.


왕은 살며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신숙주는 왕이 들어오는 기척도 느끼지 못한 채 자고 있었다.


왕은 입고 온 초구를 벗어 신숙주의 몸을 덮어 주고 돌아갔다.아침에 잠에서 깨어난 신숙주는 자신에 몸을 덮고 있는 옷을 보고 깜짝 놀랐다.



보통 사람이 입는 옷은 아니었기 때문이다.그는 밖으로 나가 내시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내시는 전날 밤 왕이 다녀갔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순간 신숙주는 세종의 온정과 은혜에 감복하여 왕의 침전을 향해 절을 하였다.그 후 신숙주와 집현전 학자들은 더욱더 학문 연구에 힘써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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