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실의 업적과 장영실의 발명품

2015. 6. 5. 23:30

장영실의 업적과 장영실의 발명품




노예신분 장영실을 알아본 세종대왕




세종이 특히 과학 분야에 눈부신 업적을 많이 남기게 된 것은 장영실이라는 과학자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부산 동례현에서 관기의 아들로 태어난 장영실은 나이가 들자 관례에 따라 동래현의 관노로 들어갔다.원래 손재주가 좋았던 장영실은 무기를 만들고 고치는 일,성을 쌓는 일,농기구를 개량하는 일 등에 뛰어난 솜씨를 보여 마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세종 5년에 평소 장영실을 눈여겨보던 동래 현검은 그를 왕에게 추천하였다.세종은 장영실의 인물됨을 알아보고 즉시 벼슬을 주려 하였으나 여러 대신들이 그의 신분이 천하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하였다.하지만 세종은 뜻을 굽히지 않고 장영실에게 상의원별좌벼슬을 주어 노비의 신분에서 벗어나게 하였다.






장영실의 발명품 - 1




임금의 배려에 감동한 장영실은 과학 연구에 온 힘을 쏟아 세종6년에 물시계를 완성하여 정5품 행사직에 올랐다.세종14년에는 중추원사 이천을 도와 천문 관측에 필요한 간의대를 만들었으며,다음 해에 천체관측기구인 혼천의를 완성하였다.



장영실은 세종 16년에 새로운 형태의 물시켸인 자격루를 완성하여 그 공로로 대호군에 오르 훈 금속 활자인 경자자의 결함을 보완한 갑인자의 제작을 감독했다.자격루는 우리나라 최초의 자동 시계로 12지신을 나타내는 동물의 모형이 시(時)와 경(更)과 점(點)에 따라 자동적으로 종과 북과 징을 쳐서 시보를 알리도록 되어 있었다.



세종은 자격루를 보고 크게 기뻐하며 경복궁 남쪽에 보루각을 지어 보관하도록 하였다.그러나 자격루가 대궐 안에있어 백성들이 시보 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되자 장영실은 해를 이용한 양부일구를 만들었고,세종은 이를 종묘 앞에 설치하여 백성들이 시간을 쉽게 알 수 있게 하였다.따라서 양부일구는 우리나라 최초의 공중시계라고 할 수 있다.






장영실의 발명품 - 2




세종19년에는 천체 관측용 기구인 대간의,소간의를 제작하였고,가지고 다닐 수 있는 해시계인 현주일구,낮과 밤의시간을 재는 일성정시의,그림자의 길이로 태양의 높낮이를 측정하느 규표 등을 완성했다.


세종 20년에는 자격루와 혼천의의 기능을 동시에 할 수있는 옥루를 만들었으며,세종 23년에는 세계 최초로 측우기를 발명하였다.이것은 1639년 이탈리아의 가스텔리가 발명한 측우기보다 약 200년이나 앞선 것이다.


그밖에도 물의 높낮이를 재는 수표교등 수많은 발명품들을 내놓은 장영실은 그 공으로 상호군에 올랐지만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고 말았다.이듬해에 임금이 탈 가마를 제작했는데 세종이 그 가마를 타고 가다 가마가 부셔지는 바람에 부상을 입게 되어 곤장을 맞고 벼슬 자리에서 쫓겨났던 것이다.






장영실의 업적




한편 군사 훈련,무기 제조,병서 간행 등에도 힘을 쏟은 세종은 왜구가 쳐들어오자 이종무를 시켜 쓰시마 섬을 정벌하게 하였고 육진과 사군을 설치하게 하여 변방을 자주 쳐들어오던 여진을 막아냈다.


세종에게 육진을 설치해야 한다고 건의한 사람은 바로 함길도 관찰사로 있던 김종서였다.김종서는 두만강 하류에 종성,온성,회령,경원,경흥,부령의 육진을 개척하였다.세종은 이후 압록강 상류에 여연,자성,무창,우예의 사군을 두어 두만강과 압록강이 국경으로 정해지게 되었다.


김종서의 인물됨을 알아보고 왕에게 추천한 사람은 어질고 청렴하기로 이름 높은 명재상 황희였다.황희는 태종 때 세자폐위를 반대하다가 남원으로 귀양을 가기도 햇는데 세종이 왕위에 오르자 귀양에서 풀려나 예조 판서에 올랐다.황희는 세종 13년에 69세의 나이로 영의정이 되어 18년 동안 세종을 도와 좋은 정치를 많이 베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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