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유정난,문종의 아들 단종과 수양대군

2015. 6. 6. 23:30

계유정난,문종의 아들 단종과 수양대군




문종의 아들 단종 vs 단종의 숙부 수양대군




세종대왕 아들 문종이 죽자 승하하자 맏아들 단종이 12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문종도 세종과 마찬가지로 죽기 전에 김종서와 섬삼문,신숙주,박팽년 등 믿을 만한 신하들을 불러 어린 세자를 잘보살펴 달라고 당부하였다.문종 역시 야심 많은 동생 수양대군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수양대군은 정인지,권람,한명회 등과 결탁하여 왕위를 빼앗으려는 음모를 꾸몄다.당시 임금은 나이가 어려 나랏일을 제대로 돌볼 수 없었고,더군다나 어머니와 할머니도 없어 수렴청정을 할 수도 없었다.대문에 영의정 황보인,좌의정 김종서,우의정 정분등이 왕을 도와 조정의 정사를 이끌어 나갔으며 글을 좋아하고 서도에도 뛰어난 안평대군의 집에는 많은 문신들이 출입하고 있었다.수양대군은 세 정승과 동생인 안평대군이 뜻을 합친다면 자신이 임금의 자리에 오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에 미리 싹을 잘라 버리기로 결심했다.





수양대군의 역모



수양대군은 단종1년에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오자마자 신숙주를 끌어들이는 한편 홍달손,홍윤성,양정 등 30여 명에 이르는 뛰어난 무인들을 모았다.그리고는 마침내 10월 10일 밤 한명회 등 계책에 따라 유속,양정,어울운등을 거느리고 김종서의 집을 찾아가 철퇴로 쓰러뜨려 죽였다.그는 단종에게 "김종서가 역모를 일으켜 죽였으나 일이 갑자기 일어나는 바람에 아뢰지 모했다"고 보고하고는 와명을 빌어,황보인,조극관,이양 등 반대세력에 속하는 중신들을 대퀄로 불러들려 죽였다.







계유정난으로 권력을 잡은 수양대군



이들의 죄명은 김종서등과 함께 안평대군을 왕위에 앉히려는 역모를 꾀했다는 것이었다.이어 정분과 조극관의 동생 조수량 등은 귀양을 보낸 뒤에 죽이고,앙평대군은 강화도로 귀양 보냈다가 교동으로 옮긴 뒤에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했다.이 사건을 계유년인 1453년에 일어났다고 하여 계유정난이라 부른다.



이로써 정권을 장악한 수양대군은 영의정부사,영경연서운관사 겸 판이병조사가 되어 문신과 무신에 대한 인사권을 장악하였고,새로이 내외병마도통사를 설치하고 그 자리에 올라 군사권마저 손에 넣었다.일이 이렇게 되자 단종은 거사에 참가한 43명(수양대군 포함)을 정난공신으로 인정하여 공신의 칭호를 내려 주었고,수양대군은 정인지를 좌의정,한확을 우의정으로 삼는 등 정난공신들을 주요 자리에 앉혀 권력의 기반을 튼튼히 했다.






수양대군 왕위에 오르다




계유정난은 성삼문,박팽년,하위지등 집현전 학사들이 김종서,황보인 등의 권력이 지나치게 커지는 것을 견제하려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성공할 수 있었다.당시 집현전 학자들은 다수의 유학자가 참여하고 공론을 실현하는 신하 중심의 정치 운영을 이상으로 여겼으므로 쟁상 중심의 정치 운영에 불만을 느꼈고,수양대군이 정적을 없애는 일에 동참할 수 있었던 것이다.그러나 숭양대군이 권력을 손에 쥐고 흔들자 이들은 수양대군에 협력하는 사람들과 반대하는 사람들로 나뉘게 되었다.



한편 단종은 숙부인 수양대군의 위세에 눌려 두렴움에 떨며 지내다 마침내 1455년 6월에 왕위를 넘겨주었다.이리하여 수양대군이 꿈에 그리던 왕위에 올라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으니 그가 바로 세조다.





'우리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갑자사화,연산군 인수대비를 죽이다.  (0) 2015.06.08
이시애의난  (0) 2015.06.07
단종복위운동  (0) 2015.06.06
장영실의 업적과 장영실의 발명품  (0) 2015.06.05
세종대왕 업적 훈민정음 창제  (0) 2015.06.04

잡순이 우리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