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오사화-훈구파vs사림파

2015. 5. 8. 10:02

무오사화



훈구파 vs 사림파 대립



성종의 뒤를 이은 연산군은 폭군으로 이름 높지만 재위 초에는 국방에도 힘을 쓰는 등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 애썼다고 한다.그 무렵 훈구파와 사림파가 대립하는 사건이 벌어졌다.성종 때부터 벼슬길에 오른 사림파들은 세력이 커지자 훈구파의 잘못된 행동을 꾸짖 었다.훈구파는 사람파를 야생귀족으로 보고 사림파가 붕당을 만들어 정치를 어지럽힌다고 비난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훈구파의 유자광과 이극돈은 각각 사림파의 중심인물인 김종직과 김일손에게 원한에 가까운 감정을 지니고 있었다.유자광이 일찍이 함양에 놀러갔다가 지은 시를 군수에게 부탁해 현판을 만들어 달게 했는데 함양군수로 부임한 김종직을 떼어내고 불태운 일이 있었던 것이다.


또한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은 성종 때 춘추관의 사관으로 있으면서 훈구파 이극돈이 전라감사로 있을때 국상이 났는데도 향을 올리지 않고 기생들과 놀았다는 사실을 사초 사기의 초고에 기록하였다.이 때문에 유자광과 이극돈은 김종직 일파를 증오하여 함께 보복하기로 마음을 모았던 것이다.






무오사화



연산군 4년(1498년) 전례에 따라 실록청이 개설되어 성종실록의 편찬이 시작되었는데 실록의 사초는 김일손이 쓰게 되었다.이때 당상관이었던 이극돈은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김일손이 사초에 실은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보게 되었다.유자광과 함게 공모하여 '김종직의 조의제문은 세조가 단종을 죽인 것을 간접적으로 비판한 내용' 이라는 상소를 올려 무오사화를 일으키고 말았다.








무오사화 결과 제거된 사림파



연산군은 즉시 유자광을 시켜 심문을 하게 했다.사건은 확대되어 평소 사림파에 불만이 많았던 유자광은 김일손 일파의 가택을 샅샅이 뒤지고 관련자들을 모조리 잡아들였다.이들 대부분은 김종직의 제자들이었다.연산군은 김일손을 비롯하여 권오복,이목,허반,정여창,김굉필 등 30여명을 죽이거나 귀향을 보냈고,모든 죄는 김종직에게 있다고 하여 이미 죽은 그를 부관참시하였다.


그 결과 대부분의 사람파들이 제거되었고,상소를 올린 이극돈 역시 문제의 사초를 보고도 내버려 두었다는 이유로 파면되어 유자광 혼자 높은 권세를 누리게 되었다.이 사건을 일컬어 사초가 발단이 되어 일어났다고 해서 '사화'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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