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간질로 시작 된 제2의 조선 왕자의 난
이간질로 시작 된 제2의 왕자의 난
즉위한 해에 송도로 도읍을 옮긴 정종은 과제를 개혁하고 학교를 세우는 등 국정에 힘썼다.
정종은 나랏일의 대부분을 아우인 방원과 상의해서 결정했으며 방원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했다.
그러자 왕위를 탐내던 방간이 불만을 품게 되었다.
그 무렵 제1차 왕자의 난 때 공을 세우고도 일등 공신이 되지 못한 박포가 방간을 찾아와 충동질하기 시작했다.
"공을 바라보는 정안공의 눈빛이 이상합니다.장차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으니 공게서 먼저 선수를 치십시오."
박포의 충동질에 결심을 굳힌 방간은 처조카 이래를 불러 넌지시 물었다.
"정안공이 나를 시기하고 있다.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이래는 방간의 속마음을 알아채고 만류했다.
"친동생을 해치려 하시면 반드시 대악의 이름을 얻을 것이고,일도 또한 이루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방간이 화를 내며 말했다.
"나를 도울 사람이면 이런 말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는 처의 양부인 강인부를 불렀지만 강인부역시 "공은 왜 이런 말씀을 하십니까?다시는 하지 마십시오"하고 물러났다.
한편 방간의 집을 나온 이래는 스승인 우현보을 찾아가 "방간이 군사를 일으키려 한다". 고 말했다.
우현보는 아들 우홍부을 시켜 이 같은 사실을 방원에게 알렸다.
형을 밀어내고 왕위를 잡은 태종 이방원
이로써 왕위를 둘러싼 형제간의 싸움이 또다시 벌어지게 되었다.
방간은 민원공,이성기,아들 이맹종과 수백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나섰고,방원 측에서는 이숙번이 나서서 싸움을 지휘했다.
양군은 선죽교 근처에서부터 가조가에 이르기까지 치열하게 싸웠지만 수적으로 우세한 방원의 승리로 끝났다.
정종은 우승지 이숙을 보내 교서를 내렸다.
"대낮에 서울 거리에서 군사를 움직인 죄 용서할 수 없다.그러나 형제지간의 정으로 차마 죽일 수 없어 귀향에 처한다."
이후 방간은 귀향을 떠났고 박포는 붙잡혀 사형을 당하였다.
이를 "제2차 왕자의 난","방간의 난","박포의 난"이라고 부른다.
이 사건으로 방원의 지위는 더욱 확교해졌고,그해 11월 정종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아 태종(이방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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