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와 무학도사(무학대사 예언,일화) 그리고 정도전과 무학대사의 궁궐터이야기

2015. 5. 30. 23:30

이성계와 무학도사(무학대사 예언,일화) 그리고 정도전과 무학대사의 궁궐터이야기




이성계의 어린시절



이성계는 고려 충숙왕 4년(1335년) 10월 11일에 함경남도 화령부에서 이자춘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이성계의 조상은 전주의 호족이었는데 4대조인 이안사가 여진족이 살고 있던 남경에 들어가 원나라의 지방관이 된 후부터 차츰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이성계의 증조할아버지 이행리와 할아버지 이춘은 원나라에서 천호의 벼슬을 지냈고,아버지 이자춘도 원나라의 총관부가 있던 쌍성의 천호로 있었다.



이성계는 어릴때부터 용감하고 기골이 장대한데다 특히 활을 잘 쏘아 인근 마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이성계는 아버지와 함께 공민왕 5년(1356년)에 고려군을 도와 쌍성총관부를 함락시키고 원나의 세력을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웠다.이에 공민왕은 이자춘을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로 임명했다.그해 4월 이자춘이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자 이성계가 아버지의 벼슬을 물려받았다.


형과 동생이 정실부인이 낳은 자식이 아니어서 벼슬자리가 이성계에게로 이어진 것이다.






이성계와 무학대사의 만남




이성계는 어느 날 함경남도 안변 근처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는데 다 허물어진 집에 들어갔다가 그 집이 무너지는 바람에 세개의 서까래를 등에 짊어지고 나오는 기이한 꿈을 꾸었다.깜짝 놀라 잠에서 깬 이성계는 다음 날 근처 토굴에서 수도하는 스님(무학대사)이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 꿈 해몽을 청하였다.꿈 이야기를 들은 스님은 한참을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세 서까래는 임금 왕(王)자를 나타내는 것이 분명합니다.훗날 왕가와 인연이 있을 듯합니다"



스님의 대답을 들은 이성계는 크게 기뻐하며 집으로 돌아왔다.이때 꿈 풀이를 해준 사람이 바로 무학대사다.



이성계는 홍건적의 침입으로 수도가 함락되자 공민왕 10년에 2,000만의 병사를 거느리고 수도 탈환 작전에 참가하여 제일 먼저 입성하는 전공을 세웠다.그는 원나라 장수 나하추가 쳐들어왔을 때도 여러 차례의 격전 끝에 함흥평야에서 적을 크게 물리쳐 세상에 이름을 알였다.우왕 3년에는경상도 일대와 지리산에서 노략질을 일삼던 왜구들을 쫒아냈다.우왕 11년에는 함주에 쳐드어온 왜구와 싸워 큰 승리를 거두는 등 명성을 떨쳤다.


이성계는 우왕 14년에 명나라와의 관계가 악화되어 요동 정벌이 결정되자.다음과 같은 4불가론을 내세워 반대하였다.




첫재.작은 나라각 큰나라를 거슬러서는 안 된다.

둘째.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해서는 안 된다.

셋째.모든 군사가 싸우러 나간 틈을 타서 왜구가 공격해 올 것이다.

넷째.지금은 무더운 비가 많이 오는 시기라 활의 아교가 녹아 쓸 수 없고 군사들이 전영벙에 걸릴 위험이 있다.










궁궐터를 두고 의견이 갈리는 무학대사 vs 정도전



하지만 우왕과 최영장군은 요동 정벌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어쩔 수 없이 출전한 이성계는 결국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려 되돌아오고 말았다.이후 정권을 손에 넣은 이성계는 새왕조의 태조가 된 이듬해에 무학도사를 왕사로 삼았으며 자신의 꿈을 풀이해 준 토굴 터에 석왕사라는 절을 지어 주고 오백 나한상을 만들어 모셨다고 한다.


무학대사는 태조에게 나랏일에 대한 여러가지 충고를 아끼지 않았고 뒷날 조선의 기틀을 세우는 데 크게 공헌했다.


한편 이성계는 나라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면서 백성들을 스리려 했지만 끝까지 고려를 섬기려는 충신들이 두문동에 들어가 나오지 않거나 먼 시골로 내려가자 나라 이름을 바꾸고 도읍을 옮기기로 결심했다.


훗날 두문동에 있는 사람들을 나오게 하려고 불을 질렀지만 한사라마도 나오지 않고 모두 불에 타 죽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도읍지로 거론된 곳은 한양과 계룡산이었다.이성계는 한양보다 계룡산 밑이 더 좋다는 의견이 있어 궁궐을 짓도록 했으나 무학도사 및 정도전 등 많은 신하들이 반대하여 공사는 중단되었고 신도안이라는 이름만 남게 되었다.



결국 도읍지는 한양(서울)로 결정되는데 궁궐터를 놓고 무학도사와 정도전의 의견이 갈리게 되었다.



한양 땅을 두루 살펴본 무학대사는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고 백악산과 남산이 좌우의 용호가 되어야 한다" 주장했지만 정도전은 "왕이 동향을 하여 나라를 다스렸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었다" 며 반대했던 것이다.


그로 인해 다시 잡은 궁궐터가 북한산 아래 남쪽방향으로 있는 지금의 경복궁 자리다.



태조 3년에 도읍을 확정짓고 본격적으로 공사를 시작해 먼저 대궐이 완성되자 동쪽 문은 봄을 상징해 건춘문,서쪽 문은 가을을 상징해 영추문,남쪽 문은 여름을 상징해 광화문이라 했다.분쪽 문인 신무문은 나중에 만들어졌다.


이어 모든 건물이 완성된 후에는 정도전이 대궐과 전각의 이름을 지었다.


이렇게 조선왕조는 차츰기반을 잡아 났다.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는 직책을 뛰어넘어 허물없이 지내는 절친한 친구 사이였던 것 같다.하루는 태조가 무학대사와 함께 수창궁을 거닐다 누가 더 농담을 잘하는지 내기를 하자고 제의했다.





이성계 vs 무학대사 농담대결



태조가 먼저 말했다.


"내가 보기에 스님은 돼지처럼 생겼소이다."


무학대사가 답했다.


"소승이 보기에 대왕께서는 부처님 같습니다"


태조는 의아해 하며 물었다.


"스님은 왜 농당을 안 하시오?"


"저는 농담을 했습니다."


"무슨 농담이 그러하오?"


"돼지의 눈에는 모두 돼지로 보이고,부처님의 눈에는 모두가 부처님으로 보인다고 말한 것입니다"


순간 태조는 크게 웃으며 자신이 졌다는 것 시인했다.




잡순이 우리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