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반정

2015. 6. 9. 23:30

중종반정



연산군의 횡포 격분한 조정



연산군의 횡포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왕은 경연과 대제학 제도를 없애고,창덕궁과 담을 사이에 두고 있는 성균관을 놀이의 장소로 만들었으며,원각사에 연방원을 두고 기녀들을 양성하였다.뿐만 아니라 전국에 채청사와 채흥사를 보내 미녀를 뽑아오게 하는 등 음란한 짓을 일삼았다.심지어 연산군은 당숙인 제안대군의 종을 후궁으로 삼기도 했으데 그녀가 바로 장녹수다.연산군보다 나이가 많았지만 미모가 뛰어나 왕의 사랑을 독차지한 장녹수는 국사에 관연하여 나라를 어지럽히고 국가 재정을 바닥나게 하였다.



한편 연산군은 사냥을 위해 도성 밖 30리의 민가를 철거하여 백성들의 원성을 샀으며,왕의 폭정을 비난하는 한글 투서 등이 있자 언문구결을 불태우는 등 한글 사용을 금지하여 국문학 발전에 악영향을 끼쳤다.


연산군이 장녹의 치마폭에 휩싸여 정사는 돌보지 않을 채 패륜의 행동을 일삼자 마침내 대의를 위해 연산군을 몰아내려는 사람들이 나왔다.바로 이조참판 성의안과 전 경기관찰사 박원종,이조판서 유순정등이었다.







중종반정 사건.연산군에 칼을 겨눈 신하들




이미 정현왕후의 허락까지 받아 놓은 박원종은 연산군 12년 9월1일 밤에 정현황후를 찾아가 거사가 있음을 알렸다.원래 거사는 9월 2일 장단,석벽에서 일으키기로 되어 있었다.연산군이 장단 석벽에 새로 지은 정자에서 잔치를 벌이기로 되어 있어 잔치를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왕을 잡아 가두고 진성대군을 왕으로 모실 생각이었던 것이다.그러나 이때 호남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던 유빈과 이과 등이 지사를 알리는 격문을 보내오자 박원종,성희안 등은 거사 일을 앞당기고 서둘어 군사를 경복궁 옆에 있는 훈련원에 모았다.



정현왕후의 처소를 나온 박원종은 훈련원으로 가 칼을 높이 쳐들고 외쳤다.



"여러분,이제 모두 칼을 뽑읍시다."



순간 반정군들도 일제히 칼을 뽑아 들었다.이때 밤늦게까지 술을 마신 연산군은 두 명의 여자를 불러들여 음탕한 놀이를 마음꺽 즐긴 후에 잠들어 있엇다.



훈련원에 있던 반정군이 크게 소리치며 대궐로 쳐들어오자 잠에서 깬 왕비는 상궁을 불러 무슨 일인지 물었다.상궁은 울면서 박원종이 반정을 일으킨 사실을 알렸고,다급해진 왕비는 왕의 침전으로 달려갔다.그러나 연산군이 이런 상황을 알 리 없었다.왕비가 흔들어 깨우지 간신히 일어난 연산군은 박원종이 거사를 일으켰다고 해도 믿지 않고 입직승지를 불러 밖의 상황을 살피고 오라고 했다.입직승지를 이때를 놓칠세라 달아났고,연산군은 한참을 기다려도 아무 소식이 없자 비로소 집을 내기 시작했다.






연산군이 물러나고 중종이 왕이 되다.




박원종이 이끄는 반정군은 먼저 연산군의 측근인 임사홍과 신수근 등을 죽이고 연산군에게 갔다.연산군은 박원종이 군사들과 함께 들이닥치자 크게 당황했다.



"전하,때는 이미 늦었나이다.옥세를 내놓으시옵소서."



박원종이 무웊을 꿇고 외쳤다.하지만 연산은 좀처럼 옥새를 내놓으려 하지 않았다.언제까지 기다릴 수 없었던 박원종은 군사들을 불렀다.



"뭣들 하느냐? 어서 폭군 연산을 끌어내라!"


박원종이 크게 소리쳤다.연산군은 칼을 뽑아 든 채 들어온 군사들을 보고 겁에 질려 어쩔 수 없이 옥새를 내놓고 말았다.


정변에 성공하자 성희안 등은 연산군을 폐위시켜 강화도 교동으로 쫒아내고 진성대군을 왕으로 추대하였다.진성대군은 이튿날인 9월 2일 경복궁 근정전에서 왕위에 올랐는데 이분이 곳 중종이며,이정변을 중종반정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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